가난한 자의 IWC, 그러나 그 이상의 가치 - 스토바 플리거
오늘날 손목시계는 액세서리로서의 기능에 충실하지만, 대부분의 명망 있는 시계 디자인은 어느 날 갑자기 뚝딱 생겨난 게 아니고, 다들 나름대로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아무도 롤렉스 서브마리너를 착용하고 심해 잠수를 하진 않지만, 이 시계는 원래 잠수부를 위한 시계였다. 해밀턴의 카키 필드는 미 육군에 지급되었던 보급 시계에 그 원형을 두고 있는데, 실제 5 ~60년대 빈티지 제품과 현행품을 비교해보면, 디자인의 차이가 크지 않다. 지금의 군인들은 카키 필드를 차고 전쟁터에 나가지 않겠지만, 디자인의 헤리티지는 시계 세상에서는 매우 중요하다. 근본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을 나누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어마어마한 가격표를 붙이고 있지만, 디자인 헤리티지가 부족한 리차드 밀이나 위블로가 마니아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봤을 때, 소위 파일럿 워치 장르는 IWC의 독무대라고 할 수 있다. 물론, 브라이틀링 네비타이머 역시 걸출한 파일럿 워치이긴 하지만 완전히 다른 형태의 파일럿 워치라서, 거의 다른 장르라고 봐도 무방하고, 2차대전 당시 군용 파일럿 워치를 기반으로 한 라인업은 IWC가 가장 두텁고, 드레스 워치인 포르투기저와 함께 IWC의 간판 라인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도 그럴만 한 것이 IWC는 2차대전 당시 영국과 독일 공군에 군용 시계를 납품한 헤리티지를 가진 브래드이다. 이를 바탕으로 한 '빅 파일럿'과 '마크 20'이 IWC의 간판 파일럿 라인업이고, 색깔, 크기, 추가 기능 등으로 어마어마하게 다양한 베리에이션을 보유하고 있다.
다만, IWC는 두가지 이유로 매니아들의 비난을 받아왔는데, 첫 번째는 롤렉스와 동등, 혹은 그 이상의 가격표를 붙이고 있으면서, 일부 모델에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아닌 범용 무브먼트를 사용해 왔다는 점이다. 이 부분은 이제 모두 개선이 되었다. IWC는 현재 전 모델에 자사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사용한다. 두 번째는 영국 공군에 납품했던 파일럿 워치를 기반으로 한 마크 시리즈가 마크 16을 기점으로 독일 공군 납품 시계와 디자인이 섞이더니, 현행 마크 20에 와서는 완연히 독일 공군 디자인으로 변해 버렸다는 점. 이 때문에 현행 마크 20은 용두 모양을 제외하고는 그저 작은 빅 파일럿이 되어 버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빅 파일럿과 마크 20은 엄청나게 팔리고 있는데, 빅 파일럿은 기본 모델 기준으로 11백만원, 마크 20은 7백만 원에 달한다.
그리고, 여기 감히 IWC에 비할바는 아니지만, 훨씬 저렴한 가격으로 파일럿 워치의 헤리티지를 즐길 수 있는 브랜드가 있다. 바로 스토바 (Stowa)인데, 사실 스토바는 매니아들 사이에선 오래전부터 가성비 시계로 유명했다. 무엇보다 스토바는 그 헤리티지가 훌륭하다. 2차 대전 당시 독일 공군은 5개의 워치 메이커로부터 군용 시계를 공급받는데, Lange und Sohne, IWC, Wempe, Laco, Stowa가 그 다섯 개 브랜드이다. 이들 다섯 개 브랜드 중 IWC를 제외하고는 모두 독일 브랜드인데, 이들 독일 메이커들은 전쟁 후에 모두 브랜드 자체가 몰락한다. 우리가 아는 빅 브랜드 랑에 조차도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했다가 독일이 통일된 후, 다시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다만, 랑에는 더 이상 파일럿 워치를 만들지 않는다.
스토바 역시 완전히 몰락 했다가, 90년대 후반에 독립 시계 제작자가 브랜드를 인수하면서, 예전 헤리지티를 바탕으로 브랜드 재건이 이루어지게 된다.
스토바는 바우하우스 디자인의 안테아 시리즈나, 배에서 쓰던 시계 디자인을 계승한 마린 시리즈 모두 나름의 매력을 갖고 있지만, 누가 뭐래도 간판 라인업은 오늘 소개할 플리거라고 할 수 있다. 빅 브랜드 랑에, IWC와 함께 독일 공군에 시계를 납품했던 헤리티지, IWC 보다 오리지널리티에 가까운 디자인에 훌륭한 마감에도 불구하고, 가격은 2백만 원 미만으로 IWC의 1/3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최근의 인기 급등과 환율 때문에 가격이 폭발적으로 오른 결과이고, 약 5년 전에 내가 구입했을 때는 채 백만 원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에는 스토바도 IWC (마크)도 모두 ETA 무브먼트를 채용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브랜드에 대한 미련만 버린다면, 너무나 훌륭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스토바는 시계 덕후가 오너인 회사답게, 로고를 넣고 뺀다던지, 각인을 해준다던지하는 소소한 옵션을 구매자가 직접 선택할 수 있다. 마이크로 브랜드 특유의 유연함이 돋보이는 부분. 단점은, 아무도 이 시계를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다. 그렇지만, 이 점은 뭐 장점일 수도 있다. 생각보다 대중들은 시계에 관심이 없어서, 스토바만 모르는 게 아니다, IWC도 잘 모르는 이들이 태반이다. 어차피 시계는 혼자만의 취미이고, 자기만족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토바 플리거를 차고 있으면, 묘한 자부심 같은게 느껴진다. 단순히 비싼 시계가 아니라, 내가 헤리티지를 이해하고, 그 헤리티지를 온전히 물려받은 제품을 착용하고 있다는데서 오는 그런 자부심이다. 돈이 너무 많아서 리차드 밀을 산 이들의 자부심과는 분명 결이 다를 것이다. 스토바의 플리거는 가격이 저렴해도, 오너가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시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