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1학년에 다니는 아이가 교내 문집에 실릴 그림일기를 숙제로 받아왔다.
우리 애는 영 그림에 취미가 없어서, 여름 방학 숙제인 그림일기를 쓰는데도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참고가 될까 해서 작년도 문집을 한 번 펴 봤더니, 이건 뭐 다들 거의 화가에, 작가 수준이다.
분명 아이가 쓰고, 그린 것이 맞는 것 같지만, 어른의 지도가 없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수준의 결과물이랄까...
결국 아이의 숙제는 절반쯤, 혹은 그 이상 어른의 숙제가 되었다.
학교에서 받아 온 그림일기 용지에 마냥 연습만 할 수 없으니, 엑셀 파일에 동일한 포맷을 그려서, 글부터 초안을 잡아본다. 그나마 우리 애는 일기를 본인 의지로 매일 쓰는지라, 그나마 그림보단 낫지만, 내가 알고 있다. 녀석이 본인 일기에 주로 어떤 내용을 쓰는지. 아침에 몇 시에 일어났다. 오늘은 브롤 스타즈 레벨을 얼마 올렸다. 밥은 맛있었다. 몇 번 들춰본 녀석의 일기는 그 정도인데, 만인 앞에 공개할 일기를 그렇게 쓸 순 없으니, 도입부가 있어야 한다, 네가 느낀 감정도 적어보자, 이건 너만 아는 장소니깐 설명이 필요해, 이렇게 끝내면 너무 갑자기 끝내는 느낌이야...이러다 보니 문장 4,5개를 적는데 한 시간이 훌쩍 지났다.
그다음 최대 난관 그림.
그림은 나도 재능이 없는지라, 인터넷에서 비슷한 상황의 이미지를 검색해서 모사하기 시작.
아이한테 그리게 했다가는, 힘들게 쓴 일기마저 망칠까 봐 밑그림은 내가 그려주고, 색칠만 하게 한다.
그러다 보니, 이것도 한 시간이고, 다 마칠 때쯤엔 약간의 자괴감이랄까....아이는 아이대로 평소보다 훨씬 늦게 잠이 들었다.
그러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전직 법무 장관의 자녀 스캔들, 또 현직 법무 장관이 임명될 때 이슈가 됐었던 자녀 스펙 만들어주기... 이런 게 그림일기 도와주기의 연장선상일 수도 있겠구나.
이제 1학년인 자녀의 숙제는 물론 도와주는게 맞겠지만, 문집의 상황처럼 그 개입의 정도가 다소 높아지고, 어느 정도 개입이 용납할 수 있는 수준인지 모호해지면, 어느 순간 어떤 부모들은 죄의식 없이 자녀가 응당 해야 할 부분을 대신해주고 있을 수도 있겠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뭐가 옳고 그르다는 얘기를 하는게 아니고, 법무 장관들께서 잘못했다는 얘기도 아니고, 그들의 시작이 그림일기 도와주기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나도 그들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는 게 대한민국의 교육 현실이 아닐까 하는 약간의 씁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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